[스크랩] 나의 아버지

백영선 2012. 6. 29.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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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 05. 18 15:40: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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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흐르는 물
Subject 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 이름은
白字 元字 俊字 를 쓰신다.

1921 년 황해도 황주군 인교면 여의리에서
白字 周字 燮字 를 쓰시는 할아버지와
성명 미상의 할머니 사이에서
외동 아들로 태어 나신 나의 아버지는,

어린시절을 비교적 풍족한 집안의 어르신들 속에서
별탈 없이 살아오시다가
19살 되던해 홀연히 집을 나서
독립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지금생각하면 청소년기의 가출이 아닌가 생각된다
어찌 되었건,
그길로 집을 나선 나의 어린시절 아버지는,
평양의 한 제철소와
사리원의 공장등에서 일을 하며 지내던중

정확한 연대를 기억하는 이가 없어
확인을 할수는 없지만
그곳 이북땅에서 결혼을 하게된다.

역시 성명 미상의 여성과 결혼을 한 어버지와의 사이에
딸이 하나 있었는데
그딸의 이름이 백 연 희 (白 蓮 姬) 이다.

그 딸이 아직 어려
젖먹이 일때에 6.25 사변이 일어나게 되고
1.4 후퇴때 흥남 부두에서 철수하는 배에 오르신 아버지는
잠시 피신한다고 생각을 하고 이남으로 내려 오셨지만,
그길로 영원히 이북의 가족과 헤어지게 된다.

나중에 수소문을 해 보았지만
그 여인이 흥남부두 근처에서 어린 아이를 업고
아버지의 소식을 알아내기위해
많은 사람들에게 묻는 모습을 보았다는 정도 이외에는
더 이상의 소식을 알길이 없었다고 한다.

결국은 그렇게 해서 이별을 하게된 아버지와 이북의 여인은
다시는 볼수없는 이산 가족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남으로 내려온 아버지는
전쟁중에는 민정경찰 (유엔경찰) 로 잠깐 군 복무비슷한
일을 하셨던 아버지는,

드디어 전쟁이 끝나고
지금의 나의 어머니를 만나게 된다.
1954년에 결혼을 하신 나의 부모님은
그 이듬해인 1955년 2 월에 첫아들인 나를 낳으시고

그후 2년뒤 딸을 낳았는데
그 딸의 이름을 이북에 두고온 딸의 이름과 같이 지었다.
아마도 두고온 딸에대한 미안함 이랄까,
아니면 잊지 못해서 일까,

그래서 3남 1녀를 두었던 나의 아버지는
곧잘 이런 말씀을 하시곤 했다.
방구석에 아이들이 잔뜩 있는게 좋아서
많이 낳을려고 했다고...

나의 아버지의 직업은
자동차 정비사였고 엔진을 전문으로 보셨는데
직장은 의정부에 있는 미 1 군단 이었다.

미 1군단 영내에 있는 차량 정비소에서 근무를 하셨던 아버지는
만 16년을 근무하시다
월남전이 한창일 무렵
PHILCO FORD 라고 하는 미국계 회사의 구인광고를 보고 지원
월남으로 가는 기술자 지원 선발에 합격,

내가 중학교 1 학년에 올라갈 무렵 월남으로 가시게 된다.
그리고는 장장 6 년간 그곳에서 근무를 하게 되는데
내가 고 3때 귀국을 하시게 된다.

별로 중요한 얘기는 아니지만
기록을 위해서 언급 하지만
그곳 월남땅에는 아버지와 현지 여인 사이에 낳은
아들도 한명이 있다.
그 아들의 나이가 아마 지금쯤은 35-7세쯤 될것으로 본다.

월남에서 돌아온 아버지는
비교적 당시에는 부자 소리를 들을 만큼 돈을 벌어 오셨고,
그래서 의정부 집을 없애고
서울로 이사를 하게 되는데
그때부터 도봉구에서의 서울 생활이 시작 된다.
내가 고 3때의 일이다.

서울로 이사를 오신 아버지는
쌍문동에 큰 집을 사게 되는데
대지가 44평에 건평 25평의 단독 주택이다.
큰방이 4개가 있고 부억도 컷으며
마루도 넓었고 가게터도 딸린 그런 집이었다.
마당도 넓어서 개를 두마리나 키우키도 했다.

서울로 오신 아버지는 다른분의 권유로
쌀장사를 시작하게 되는데
경헝없이 시작한 쌀 장사라 큰 재미는 못보고
손해만 보게된다.

그후 또다른 친구분의 권유로 집장사를 시작하게 되는데
그게 그만 잘못되고 만다.
집을 지어서 파는 일인데
마침 건축 경기도 나빳고
자재가 파동이 나서,
시멘트를 구할려면 선돈을 내고
새벽같이 가서 줄을 서야 몇포 구해올수있었다.

그바람에 집값은 천정부지로 뛰고
그 바람에 지어논 집은 안나가고,
인건비에 자재비에 묶여버린 자금줄에
그만 손을 털고 말게 되는데,
그때 전 재산을 날리게 된다.

모든것을 정리하고
방 두개짜리 월세방으로 이사를 한 우리 가족은
그때부터 힘든 세상을 당분간 살아가게 된다.

아버지는 복덕방에 나가 소일거리로 용돈이나 쓰시는 정도이고
어머니는 동네 앞에서 꽃을 파는 노점일을 하시게 된다.
마침 그때, 나는 군에 입대할 나이가 돼서
이사를 해놓고 3일후 입대를 하게 되고
당시 집에는 셋째 영욱이와 막내 영필이가 있게 된다.

아버지의 활동은 이때부터 거의 정지된 상태라고 봐야 한다.
내가 제대를 한후 결혼을 해서
가정의 주된 수입원이 나였을때도
아버지는 여전히 복덕방에서 소일거리로 일을 하셨고,

그후 여동생의 초청으로 어머니가 미국으로 가시고 난후에도
몇년후 아버지가 미국으로 가실때 까지도,
아버지의 직업은 복덕방 이었다.

미국으로 가신 아버지는 그곳에서 생활을 하시다가
대장암 진단을 받으시고
3 개월후 세상을 떠나신다.

2000 년 1월 음력으로 12월 23일,
80 세를 사시고 가신것이다.
나는 100 살까지 살거라고 늘 말씀 하셨다.
조금만 몸이 이상해도 병원으로 뛰어가서 혈압도 재고
영양제도 드시고 그러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실 무렵,
한국에서 약을 지어 보내든지
우황청심환이라도 보내드리면
어머니약인줄 알면서도 당신이 먼저 드시곤 했다.

평생을 당신밖에 모르고 사신 분이다.
평생을 家王이라고 손수 부르셨던 분이다.

술을 유난히 좋아해서
꼭 반주를 하셨고
밤에 술이 없으면 불안해서 잠을 못 주무셨다.

그래서 퇴근후 냉장고를 열어보고
아버지의 방문을 열고
술이 있나 없나를 확인 하는게 나의 첫번째 일이었고
없으면 늦은 밤에라도 나가서 술을 사다가 드려야 했다.
그래야 마음놓고 주무시니까..

성격은 매우 급한 편이어서
어릴때는 아버지의 가죽 혁대로도 많이 맞았었다.

지금도 기억 나는건
아버지가 월남엘 다녀온후 딱 한번
우리 형제들을 데리고
의정부에 있는 안골 유원지를 가신 일이다.

좀처럼 자식들과의 시간을 보내는데 인색했던 아버지는
어렸을때,
직장에서 가끔 가는 야유회 정도 외에는
우리들을 데리고 가신곳이 한곳도 없었다.

그래도 가정교육은 엄해서
버릇없는 아이로 키우지는 않으셨다.
그런분이 나의 아버지 셨다...

출처 : 굴다
글쓴이 : 흐르는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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