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스크랩] 나의 어머니
백영선
2012. 6. 29. 12:48
:
[ 2004. 05. 19 06:49:08 ]
View
Name 흐르는 물
Subject 나의 어머니
나의 어머니는 천사이셨다.
金貞玉 이라는 이름을 가진 천사 이셨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인연 보다도 소중하고 값진 인연이
바로 어머니를 만나는 인연인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이 세상 모든 어머니란 다 소중하고
값진 인연이 될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어머니는
그 어떤 어머니 보다 훌륭하셨고
아름다운 삶을 살다 가신 분이었다.
어머니의 고향은,
충남 예산이다,
충남 예산군 응봉면 건지와리 1구.
이것이 지금까지 내가 외우고 있는 어머님 친척의 주소다.
그 주소에 살고있는 분은 주선봉오,
줏어온 봉오라는 뜻으로 오래 살라는 옛날식 호칭이다.
어머니가 태어난 고향집은,
예산군 예당저수지 근처의 대흥 장터라는 곳이 있는데
대흥장이 열리는 장터를 말함인데
바로 그 장터 입구에 있는 한옥집 이었다.
전형적인 한옥 으로서,
나무 대문을 열고 문지방을 넘으면
마당이 넓었고 바로 정면으로 부엌이 보이기도 했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어릴때 이름은 댕이였다.
원래는 아명이 대영이 였었는데
그냥 줄여서 부르다 보니 댕이가 된것 이었다.
그래서 그 장터에서는 댕이네 집으로 통했고
댕이라 하면 모두 알았을 정도였다.
외할아버지의 성함은 金秉鎭씨 였고
성몀 미상의 외할머니와의 사이에서
무남 독녀로 태어나셨다.
아버지도 독자셨고,
어머니도 외동딸이셨던 것이었다.
모두가 외로운 분들 이었다.
천성이 워낙 고우셨던 어머니는
장을 담그건 김장을 담그건
항상 어려운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셨고
그중 광복이라고 하는 친구네 식구는
거의 수십년을 우리와 함께 살다시피 하면서
형제처럼 지내기도 했다.
여느 어머니도 마찬가지 였겠지만,
나의 어머니도 항상 자식을 위해 뭔가를 하셨고
4남매를 키우시면서도 늘 행복해 하셨다.
앞집 옆집 뒷집,
모두가 형제처럼 지냈으며
때만 되면, 때가 아니라도
항상 나누어 먹고 나누어 주고 그랬던 것이다.
거기에는 항상 나의 어머니가 계셨고
쌀이고 된장이고 담아서 나가실때는
또 누구네를 갔다주러 가시는게 분명했다.
아버지가 항상 힘들게 했어도
그 모든것을 다 참아 내셨고
그 뒤에는 자식인 우리가 있어서 였다고 늘 말씀 하셨다.
지금 생각하면 내 나이보다 더 젊으셨던
어머니의 모습인것 같다.
그토록 참고 인내하셨던 어머니께서
여동생의 초청으로 미국으로 가시게 된다.
정확한 연도를 기억 하기는 어렵지만
지금 기억으로는 1985년 전후로 기억이 된다.
88 서울 올림픽때는 분명히 안계셨었다.
그후 여러번 한국에 나오셔서 시간도 보내고
아들들도 만나고 하시다가
젊어서 부터 생긴 화병으로
고혈압 증세를 보이기 시작 하신다.
사실 나중에 아버지가 미국으로 가실때쯤 나는 많이 망설였다.
어머님이 고혈압으로 고생을 하고 계시는데
아버지 께서 가시면 분명히 안좋으리라고 예상을 했기 때문 이었다.
그러나 어머님은 괜찮타고 하시면서,
끝내 아버지를 미국으로 불러 들이셨던 거였다.
당시에 아버지 문제로
나와 아이들 엄마 사이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고
그로인해 어머니가 걱정을 하시던 끝에 아버지를 데려가신 것이었다.
그후 나의 예상은 적중했고,
미국으로 가신 아버지는 그곳에서도 어머니를 역시 힘들게 하셨고
그로인해 나와 형제들은 아버지에게 강력한 경고를 보내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결국은 두분을 떼어놓는 사태로 까지 발전이 된다.
그러다 어머니는 나의 이혼을 목격 하시고
몹씨 힘들어 하셨다.
나역시 장남이라는 허울에
허둥대며 살아야 했고.
결국은 세번의 뇌 수술끝에
어머니는 그 짧은 생을 마감 하신다.
T.V를 보시던중 동생의 품안에서.....
그날이 11월 19일,
어머님이 탄생하신 날이었다.
아버지와는 아홉살 차이의 나이셨다.
그러나 63세로 생을 마감하기에는 너무 짧은 세월이었고
그래서 더 비통함에 젖는다.
늘 조용하고 웃고 자상하신 어머니 였다.
어린나이에 봤던 어머니 였지만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누가 그런 천사를 데려갔는지
너무 아쉽다.
너무 슬프다.
대흥 장터의 댕이에서,
훗날 영선 엄마로 블리울때까지,
그 분의 삶은 천사였고
아름다운 어머니의 모습 이었다.
내가 다시 사람으로 태어난다 해도
그분을 다시 어머니라는 인연으로 만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열번 죽고 백번울 죽어도
그런분이 나의 어머니 였었다니,
그보다 더 좋은 인연이 어디 있겠는가...
어머니 에게는 두분의 이모가 있었다.
물론 친이모는 아니다.
할머니께서 형제분이 었는데
그 형제 할머니의 자식으로 두분이 계셔서
그분들이 이모가 된것이다.
비교적 가깝게 오랜시간을 만나 왔지만
어머니가 미국으로 가시고 나서는
조금 덜 만나졌다.
집안에 행사가 있을때는 더러 만날수 있었으나,
그나마 내 생활이 바뀌면서 더 만나 지지가 않았다.
벌써 오래전 일인데
지금은 연락도 안되고 소식조차 모른다.
나를 받아주신 할머니가 계셨는데
그분도 벌써 돌아가셨을 거라 생각이 든다.
그 외에 육군 장교 출신의 대혁이 삼촌,
어머니의 친척 동생이다.
아까도 언급 했지만 부리부리한 눈의 주선봉오 아저씨,
답십리에 살던 어른쪽의 친척되시는 분,
그 몇분들이 어머니의 그나마 친척 들 이셨다.
출처 : 굴다
글쓴이 : 흐르는물 원글보기
메모 :